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실리오스 2세 (문단 편집) == 평가 == >'''그는 반란을 진압하고, 봉건 지주를 복종시켰으며, 제국의 적(특히 도나우 강 인근 지역과 동부)을 정복했다. 로마군의 권세는 어디서든 경외의 대상이었다. 황제가 전쟁에서 가져온 약탈품 덕에 재정은 가득 넘쳐났다. 학문의 등불은 황제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조금 희미하게나마 여전히 불타올랐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중들 다수는 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의 삶은 화려하고 다채로웠다. 설사 도시의 방어 시설 어딘가가 파손되었더라도 침공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 >[[미하일 프셀로스]] 바실리오스의 군사적 업적은 일인칭 형식으로 서술한 그의 비문에서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문서 하단 참조). 불가르족의 학살자라는 별칭에 가려져 바실리오스가 불가리아 이외의 곳에서 거둔 군사적 승리, 루스족을 개종시킨 일, 할아버지와 같은 방법으로 동로마의 백과사전 문화를 후원한 업적은 잘 조명받지 못했다. 그는 또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엡도몬[* 지금의 이스탄불 바크르쾨이 지구]에 성 요한 세례자 성당을 건립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외곽의 군대 연병장 옆에 부속 황궁[* 블라헤르네 궁전.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시까지 동로마 황제의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전소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을 둘 정도로 경건한 인물이었다. 병력 만큼이나 재정 관리에도 치밀해, 그가 죽을 무렵 유사시를 대비해 비축한 비상금이 '''로마 제국 국가 예산 2년치를 훌쩍 넘길 정도'''였다. 비슷하게 거대한 영토를 수복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국고가 부족했던 것과 대조되는 점. 물론 이 돈은 후임 황제들이 나중에 전부 까먹지만, 사후 몇십 년 후에도 물가에 영향을 줄 정도로 막대한 규모의 자금이었다. 바실리오스는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옌니토스가 의전서에 정리한 '''제국이 절대 외국인에게 넘겨줄 수 없는 세 가지''' 중 하나를 포기했다. 그 세 가지인 즉슨, '''황실에서 태어나고 자란 공주'''(포로피로옌니타, [[안나 콤네나]] 항목을 참조)'''''', '''[[그리스의 불]]''', '''자줏빛 제관'''(제위)''''''였는데, 황실에서 태어나고 자란 공주인 자신의 여동생을 [[키예프 루스]] [[대공(작위)|대공]] 볼로디미르에게 시집 보낸 것이다.[* 이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초년기 바실리오스 2세가 많은 정치적 위기와 악조건에서도 끝까지 쫓겨나지 않은 이유가 그 또한 포르피로옌니토스로서 '''정통성의 끝판왕'''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동로마 황실은 절대 포르피로옌니타를 다른 나라로 출가시키지 않았다. [[오토 1세]]의 며느리 테오파노도 황실의 여자였을 뿐 포르피로옌니타는 아니었다[* 명문 군벌인 스클리로스 가문 출신이었다.]. 그래서 바실리오스 2세도 처음에는 내키지 않아 하였고, 아예 번복하기에 이르나 분노한 볼로디미르 대공이 제국을 침략하여 바르나 등을 점령하자 어쩔 수 없이 원래 약조대로 한다. 다만 이 이후로부터는 동로마 제국에서 본격적으로 공주들을 다른 나라에 결혼을 보내기 시작했고, 제국으로 시집오는 외국인 황후들 또한 더 잦은 빈도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까지의 동로마 제국이 포르피로옌니타(제위 계승권과 직결된 황실의 공주)를 다른 나라로 출가시키지 않고, 외국인 황후도 잘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돌려말하면 이 시기 동안 동로마 제국이 그들이 인지하는 세계 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외국'이 없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서로마 분열-서로마 멸망 이후 동로마의 가장 위험한 경쟁상대이자 주적은 7세기 이전까지는 [[사산조 페르시아]], 7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제국]]이었고, 이들은 군사력이든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든 동로마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강대국이자 선진국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 종교적으로도 '기독교 세계에 속하지 않는' 적대적인 관계였기에 왕실 결혼을 통한 동맹이나 협력을 고려할 상대가 아니라 말 그대로 경쟁 상대이자 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 반면 다른 이웃 국가들, 특히 국혼의 대상으로 고려할 만한 기독교권 국가들은 아직까지 동로마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맹 세력으로 인정받을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동로마 제국은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강대국'으로써 다른 어떤 나라와도 대등한 동맹을 맺을 수 없고, 맺을 필요도 없기에 황실 결혼과 같은 형태의 외교정책을 취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서로마 멸망 이후 장기간의 분열-혼란기에 휩싸였던 서유럽에서 [[샤를마뉴]]의 [[프랑크 왕국|제국]]이 그 분열과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자 당장 동로마의 이리니와의 혼담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논의되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마케도니아 왕조 후기, 바실리오스 2세 이후부터 황실의 공주들이 외국의 군주와 결혼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잦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 역시 명확하다. 대략 이 시기(서기 1000년 전후)부터 유럽-지중해 기독교 세계의 다른 나라들 역시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도 더이상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자리잡았고, 따라서 이들과도 대등한 입장에서 외교적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는 마케도니아 왕조 이후, 동로마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었던 [[콤니노스 왕조]]의 외교적 정책 노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제1차 십자군 원정|서유럽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 하면서도 이전까지 로마 제국이 가지던 외교적 입장에 따라 십자군 제후들을 제국의 통제 하에 있는 야만인 용병처럼 인식하고 대우하였으나 이러한 외교 노선의 결과물은 썩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따라서 손자인 [[마누일 1세]]의 시대에 오면 이러한 인식이 완전히 전환되어 본격적인 친 서방 노선, 즉 서유럽 국가들과 (왕실결혼 등을 포함하여) 적극적이면서도 동등한 외교적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결국, 포르피로옌니타를 <제국이 절대 외국인에게 넘겨줄 수 없는 것 세 가지> 중 하나로 꼽은 콘스탄티노스 7세의 의전서는 <제국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이념적 원칙> 이라기보다는 "당시 상황에서 제국이 취해야 하는 지침"에 가까웠고, 이후 제국이 처한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이 원칙 역시 변화할 수 있었던 셈. 다른 하나인 제위는 1204년 알렉시오스 5세가 수도에서 도망가고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에 협의하여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제위에 올림으로써 끝났다. 그리고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어 제국 자체가 멸망하기에 이르지만, 나라가 없어진 상황에서야 의전서고 뭐고 의미가 없으니 이하 생략. 가장 오래 외국에 넘겨지지 않은 것은 바로 '''[[그리스의 불]]'''. 그리스의 불은 출현하자마자 각종 짝퉁이 넘쳐났으나(아랍은 물론이거니와 십자군도 사용했다!), 그 정확한 배합 비율은 극비로 취급되어 4차 십자군 당시는 물론 1453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유출되지 않았다. 물론 화약 병기의 발전으로 고대와 중세를 풍미했던 액체 화약의 필요성이 감소한 것도 클 것이다. 다만 적어도 이런 사항을 동시대인들이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진 않으며, 그들이 황제에게 불만을 품은 부분은 따로 있었다. 물론 황제로서의 바실리오스 2세는 아주 직무를 열심히 수행했다. 전쟁터에 나가서 지휘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만 좋아했던 게 아니라, 수도에 있을 때면 황궁 내의 사무실에 틀어박혀 산더미처럼 쌓인 결제 서류들을 밤이 늦도록 일일이 직접 처리하고 지시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야전에선 본래 하급 장교들이 해야 할 전투 장비 지휘 검열을 열병식 때 몸소 하면서 열외 조치까지 직접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문화 활동은 물론 옷을 멋지게 입는 것조차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씻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데다가, 연인은 고사하고 친한 친구도 만드는 일이 없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개인의 개성에 관대한 현대의 사회인이라도 이런 식이면 주변의 시선이 곱지 못할 텐데, 그는 그 당대에도 천 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중세 강대국, 그것도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이 자리는 결코 사생활이나 개인의 개성 같은, 중세에는 있지 않았던 개념이 존중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황제]]라는 자리에는 제국의 최고 지도자라는 역할로서 제국의 위대함, 권위, 세련됨 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표출하고, 또 그걸 적극적으로 가꾸고 외국과 자국 내 신민들 모두에게 과시하여 결과적으로 문화력으로 표현되는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 자체를 강화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근대 이전의 군주들이 많은 자금과 노동력을 소모해서 후세가 보기에는 스케일이 큰 사치에 불과한 거대한 궁전, 종교 건물, 문화 시설들을 지은 건 물론 군왕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기호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지만, 주된 목적은 결코 왕 혼자 억수로 큰 궁전에서 놀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서 왕실의 권위 자체를 지속적, 적극적으로 표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 민주 국가의 국가원수라면 모를까 11세기의, 그것도 전제군주제 국가의 국가원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바실리오스 2세는 이런 면에선 완전히 무관심했을 뿐더러, 좋아하지도 않았다. 모든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일이자 취미이기도 했던 군대 지휘와 내정 관리에 그런 것들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실과 인간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 극도의 실용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극도의 실용주의가 압권을 발휘했던 건 상술한 장비 검열 때 일화인데, 바실리오스 2세는 부하 병사들이 본인을 맞이했을 때 박수치는 행태도 싫어해서 하지 못하게 했다. '''떠들썩하게 박수치며 난리피우면 군인들의 소중한 체력이 낭비된다는 것.''' 바실리오스 2세와 함께 숙영하던 부대들은 적어도 중요한 전투에서 이기기 전까진 파티나 놀이도 즐기기 어려웠다. 이유는 물론 체력을 쓸데없는 데 낭비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앞서 이야기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군인들과 장군들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이 황제를 그다지 좋아할 수가 없었던 건 무리가 아니며, 트레드골드가 정확히 지적한 "박약한 책임감"이란 지적[* "후계 문제에 대한 관심의 지적만큼 바실리우스 2세의 박약한 책임감의 개념을 뚜렷이 드러내주는 것은 없다." 워렌 트레드골드, 박광순 역 <비잔틴 제국의 역사> p.256]은 바로 여기에서 근원한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그가 해야 했던 이런 역할을 전담하는 사람은 정작 따로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그의 동생이자 후세에 무능한 황제로 이름난, 이름 뿐인 공동 황제 [[콘스탄티노스 8세]]였다. 이 사람은 평생 놀고 먹으면서 스포츠 경기나 하고, 성대한 의식을 아내와 함께 집전하는 게 일이었다. 권력 가진 형님 황제는 일이 취미라 권력을 누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실권 없는 동생 황제는 형이 귀찮아서 싫어라 하는 공적 의식 참여와 집전 그리고 사교 활동하면서 노는 게 일[* 콘스탄티노스는 어린 시절부터 평생동안 형의 정치적 조력자로서 당대에 흔히 발생하는 부모 자식, 형제지간에도 쉽게 저지르는 배신을 저지르지 않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 형에게 충성하는 든든한 아우였고, 초기 권력 투쟁 시기에는 형과 함께 군사 귀족들의 반란 진압에 직접 선봉에 선 경력도 있다. 바실리오스 2세의 사후 황제로서의 통치가 무능하다고는 하지만, 그의 치세에 딱히 큰 문제가 터지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그의 선임 황제로서의 제위 기간은 겨우 2년에 불과했다. 문제는 2년 동안이라 한들 그 짧은 기간 동안 형이 심혈을 기울여 세워놓은 토지 정책을 대부분 다 엎어버린 데다가, 후계자 선정도 어처구니없이 이뤄졌고 그 기간 동안 딸들을 결혼시켜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이사키오스 1세까지의 불안정했던 제위 계승과 다툼으로 인한 제국이 쇠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제국 황후가 해야 하는 모든 중요한 일은 진작부터 제수가 떠맡아 하고 있었다. 바실리오스 2세에게도 나름대로 할 말은 있었던 셈이다. 어쨌든 상술한대로, 업적으로만 보면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같은 과거의 [[대제]]들은 물론, 한세기 반 뒤의 대제인 [[마누일 1세]]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인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꽤 박했고, 그를 군주로 존경하고 좋아했던 건 그의 군인들 뿐이었으며, [[대제]] 칭호 또한 받지 못했다. 게다가 대체로 후세에 [[명군]]이라 이름난 군주들은 성격이 [[괴팍]]한 경우는 있어도 나름대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데[* 제국 창건자인 아우구스투스만 하더라도 성격이 무척 차갑고 냉혹했지만 워낙에 미남이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당연히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 드루실라|황후]]도 있었고 마음을 터놓고 지낼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동성 친구]]도 있었다.], 바실리오스 2세에게는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자신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이런 의미에선 세계사적으로도 꽤나 특이한 경우다. 허나 그 당대인들의 아들, 손자 세대에서 그의 대한 [[재평가|평가는 180도 바뀌게 되는데]] 조카 딸인 조이의 남편들, 여동생, 양자의 치세 그리고 그 경쟁자들 간의 권력 암투를 뒤에 두고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후계자라는 표면적인 이름의 들러리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에게 보인 일련의 무뇌적인 행각들과 바실리오스 2세의 뒤를 이은 무기력하거나 무능하거나 정통성 없는 황제들의 지배, [[페체네그족]]과 [[투르크]]족, [[노르만족]]에게 시달리던 11세기 중반 당대의 백성들이 아버지, 할아버지들에게서 이야기로 들어온 마케도니아 왕조 시절 무적을 자랑하던 제국의 영광에 대한 향수가 그의 대한 후세대의 평가를 극적으로 바꿔놓게 된다. 이후 [[콤니노스 왕조]]의 중흥기가 다시 한 번 도래하기는 하지만 강대국 동로마 제국이란 의미에선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였기에, 이러한 그의 모습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비잔티움 연대기의 작가 노리치는 그가 사망한 다음날인 1025년 12월 16일을 동로마의 몰락이 시작되는 날로 보았다. 총평하자면 바실리오스 2세는 군주로서의 능력은 그 어떤 명군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지만, 후계자 양성만큼은 능력의 유무 이전에 관심조차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